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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sentence

읽는 대로의 존재..

[신문의 날 특별기고] “기자는 읽는 대로의 존재다”

중앙일보 2011.04.07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언론환경에 말의 과장 없이 지각 변동 수준의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종이신문이 그렇고, 전파방송이 그렇고, 인터넷 매체들이 그렇다. 신문과 신문기자들에게 이런 변화는 현실 적응을 위한, 더 솔직하게는 살아남기 위한 일대 변신을 요구한다. 취재·보도의 글쓰기가 달라지고, 신문의 존재가치와 패러다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메이저 신문들이 종합편성 방송 등 다양한 활로를 찾는 것도 시대적인, 아니 문명사적 요청이다.

 신문기자들은 속보는 트위터·페이스북·뉴스전문방송에 넘겨주고, 사건의 배경을 장황하지 않게, 쿨하게 설명하는 글쓰기를 체득해야 한다. 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렵다. 종이신문 기자들은 체질상 인터넷 매체가 넘볼 수 없는 사건의 의미와 본질을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낯선 언론환경에 섰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짧지만 깊이 있는 기사를 쓸 수 있다. 한국에만 있는 신문의 날, 외람되게 나의 기자 53년을 돌아보면서 “기자는 읽는 대로의 존재”(Journalist is what he/she reads)라는 경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인다.



 이 경구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먹는 대로의 동물(Man is what he eats)”이라는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올해 기자생활 53년째를 맞는 나의 길고 긴 여정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나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때로는 무언으로, 때로는 자극적인 말로 영향을 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의 기자 53년이 있다는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내가 기자가 되기 전에 고인이 된 사람은 그의 탁월한 기사를 통해서, 내가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자극하는 고전적인 저서를 통해서 기자인 나를 ‘읽는 대로의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내가 1958년 한국일보에 입사하기 한 달 전 최병우씨가 금문도 취재 중에 상륙정 전복으로 순직했다. 그때 중국은 장거리포로 연일 금문도를 포격하여 대만해협에 전운(戰雲)이 급박했다. 한국일보 편집국에는 그의 숨소리, 그의 체취, 그의 지적 향기와 기자정신이 남아 떠도는 것 같았다. 내가 기자로서 최초의 지적 자극,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은 것이 바로 그 무렵이다. 한국일보 도서실의 최병우 코너에는 그가 중학 시절부터 읽던 손때 묻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책 표지 안쪽에 책을 읽은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중학 때 읽은 책 중에는 역사 서적과 함께 『파우스트』를 포함한 괴테의 작품들이 많았다. 페이지를 주르륵 넘겨보니 여백에 많은 것이 적혀 있었다. 나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파우스트』 독일어판과 일본판을 대조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아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씨름하고 있었는데 최병우씨는 중학 다닐 때 그것을 읽고 있었다. 그가 읽은 책들은 주로 문(文)·사(史)·철(哲)이 많았다. 나는 낙후감을 느끼면서 그가 읽은 책들의 제목을 메모했다.

 나는 1965년 창간을 한 달 앞둔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일보에서 내 기자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엄한 보스, 큰 스승, 자상한 멘토(Mentor)를 만났다. 그가 고(故) 홍진기 회장(당시는 부사장)이다. 홍 회장은 기자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책 읽으라”, “공부하라”고 독려했다. 내가 “김군은 요즘 무슨 책 읽나?”라는 질문을 받은 것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제일고보(경기중학) 시절부터 독서광으로 알려진 그에게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고 둘러댈 수도 없었다. 1980년대에 나는 홍 회장의 해외여행을 자주 수행했다. 그는 일단 도쿄에 들러 여행 중에 읽을 서너 권의 책을 샀다. 이길현 중앙일보 지사장(나중에 삼성 재팬 사장)은 홍 회장이 지시한 책을 살 때 여분으로 한 권씩 더 사서 내게 안기면서 말하기 일쑤였다. “후딱 읽어 두라고!”

 중앙일보 기자들 사이에 홍 회장의 말을 흉내 낸 “이 사람아 공부 해!”가 유행어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외국의 수많은 언론인, 학자, 정치지도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들의 지적 향기를 맡고, 그들의 통찰력에 감화되고, 그들이 읽었거나 쓴 책을 읽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인터뷰도 했다. 칼럼니스트 조지 윌과 조셉 크래프트, 뉴욕 타임스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의 집 서재를 방문했을 때는 서가에 꽂힌, 고금을 망라한 책들에 압도되어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조지 윌의 서가에는 그리스 철학 책이 많았고, 솔즈베리의 서가와 소파 위와 방 바닥에는 영어로 된 자료들 외에 러시아어와 중국어로 된 책과 자료들이 꽂히고 나뒹굴었다.

 나의 긴 기자생활의 여정에는 몇 사람의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중 한 사람이 슬로베이나의 슬라보이 지제크(Slavoj Zizek) 교수다. 그는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그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을 통해서 헤겔을 읽는다는 식의 책을 써서 주목을 받고, 9·11과 팔레스타인 등 수많은 현실문제를 철학자의 시각으로 조명하는 책을 양산해 낸다. 그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봉으로 『천개의 고원』, 『안티 오이디푸스』, 『차이와 반복』의 저자인 질 들뢰즈 수준의 철학자인데 그 두 사람의 저서들은 기자의 생각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머리를 재충전시키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새로운 개념들과 용어들로 넘친다.

 나는 기회가 닿으면 후배 기자들에게 두 가지 충고를 한다. 술 잘 사는 선배, 2차, 3차까지 붙들고 폭탄주 돌리는 선배를 경계하라는 것이 그 하나요, 늦기 전에 5개년, 10개년 독서계획 같은 것을 만들어 신들린 사람처럼 책을 읽되 맡은 분야에 관계없이 문사철의 바다에 한 이삼 년 푹 빠져보라는 것이 그 둘이다. 기자가 왕성한 독서를 한다고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동시에 우리는 독서가 싫은 사람은 기자로, 아니 적어도 라이터(Writer)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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